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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ck 'n' Roll

용감한 소녀들

Spirit of Radio 2018. 8. 18. 07:31

나와 어느 정도 가까운 이들은 알고 있지만, 나는 하드락과 헤비메탈을 좋아한다.  아주 많이 좋아한다.   

 

사실 헤비니스 음악의 팬으로 산다는 것은 - 특히 한국인으로서는 - 퍽이나 외로운 일이다.  "아직도 고등학생 입맛에서 졸업하지 못했냐" "이 시끄럽고 소리만 꽥꽥 지르는 걸 어떻게 듣냐" "악마 숭배냐" "당신 알고보면 속이 뒤틀린 사람 아니냐"는 등 듣다보면 나름 흥미로운(..) 편견과 핀잔의 대상이 되기 일쑤이고, 해당 장르의 음악을 새로이 접하거나 들을 수 있는 경로도 타 장르에 비해 제한되어 있으며, 보고 싶은 공연이 있으면 좋건 싫건 혼자 가게 되는 게 다반사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이런데 음악가들의 고충이야 오죽하랴.  하지만 이토록 척박한 환경에서도 좋은 한국산 헤비니스 음악은 신기하리만치 꾸준히 나오고 있는데..

 

..심지어 최근에는 락/메탈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노래하는 걸그룹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들의 이름은 드림캐쳐.

 

 

잘 정리해서 쓸 자신이 없으니, 이 그룹과 그들의 음악에 대한 단상들을 두서없이 늘어놓자면:

 

    • 음악이 꽤 빡세다.  여러해에 걸쳐 간헐적으로 등장해온 웬만한 '아이돌 밴드'들보다 훨씬 본격적인 락/메탈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다.  (뭐 문희준처럼 이미 쌓아놓은 거대 팬덤이 있다면 모를까 처음부터 밴드 구성으로 시작한 아이돌 그룹이 메탈을 주종목으로 하긴 힘들테니..)  전반적으로 어둡고 공격적인 톤이나 극적인 전개, 묵직한 악기 소리 등 대충 구색만 맞추는 게 아니고 '제대로' 만들려고 공을 들인 흔적이 여기저기서 느껴진다.  타이틀곡 외의 수록곡들도 대부분 고른 완성도를 보이는 것도 강점.
    • 안무는 더 빡세다!  드림캐쳐에 관심을 갖게 된 이후 연습 및 라이브 영상을 몇 개 보게 되었는데, 이 아가씨들, 장난이 아니다.  안그래도 템포가 빠른 음악에서 박자를 더 쪼개어 거의 음절 단위로 빈틈없이 동작을 채워 넣었다.  컨셉이 컨셉이다보니 역동적이고 특이한 동작들이 많은데, 그걸 무슨 의장대마냥 각을 살려 소화하는 걸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올 지경.  7명이면 적은 수도 아닌데 대형에 흐트러짐이 없이 척척 합을 맞추는 모습을 보면 노력과 연습의 힘이란 정말 대단한 거구나..라고 느끼게 된다.
    • 게다가 노래도 잘한다!  특히 멤버 중 과반인 4명은 개성있는 음색과 수준급의 가창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 메인 보컬 하는 친구는 락에 어울리는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멋진 벨팅을 보여준다.  나머지 멤버들도 각자 자기 파트에서 안정적으로 곡의 분위기를 살릴 정도의 기량은 되는듯 하다.  과한 기교를 부리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들고.

(진짜 잘한다.)

 

신나게 칭찬했으니 아쉬웠던 부분도 몇가지:
 
    • 곡의 전개나 편곡은 대체로 맘에 들지만, 악기들의 연주나 믹싱에서 느껴지는 박진감은 부족하다.  아무리 메탈을 바탕으로 한다고 해도 악기소리가 메인이 될 수는 없는 아이돌 음악의 한계일 수도 있겠지만.. 
        • 기타 소리의 타격감이 부족하고 (날이 무딘 느낌?), 뭣보다 연주가 단조롭다.  가끔 솔로 비스무리한게 들어가긴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드라이브 걸고 코드 배킹만 꾸준히 하면서 별로 전면에 나서지 않고 있다.  소녀들의 목소리와 부딪히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그리 했을 수도 있고, 인상적인 기타 리프가 없는 대신 키보드나 현악기 (신디사이저 쓴 거 같다) 등이 그 자리를 메우고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메탈이라는 장르에서 기타가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했을 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 드럼도 비슷한 느낌인데, 프레이징이 좀 더 과감하고 정교했다면 좋았을 것 같다.  사운드는.. 이거 머신으로 찍었나 할 정도로 무척 심심하게 녹음이 되어있다. 
        • 베이스는 이만하면 만족! 
    • 딱히 단점이라긴 뭐하지만, 단번에 눈길을 끄는 압도적인 카리스마 이런 게 느껴지는 멤버가 (아직은) 없다.  예를 들어 블랙핑크의 제니 같은 애..  사실 개개인이 튀지 않기 때문에 '그룹'으로서의 퍼포먼스가 더 빛나는지도 모르겠다.  굳이 비교하자면 (따로 또 같이, 개인의 개성과 스웩을 중시하는) YG보다는 (그룹으로서의 '합'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SM쪽에 가깝달까. 
    • 한국 아이돌 음악의 고질적인 문제라고도 할 수 있는, "랜덤하게 삽입된 말 안되는 외국어 (주로 영어) 추임새"가 여기저기 들린다.  그나마 우리말 가사가 멀쩡하다는 데서 위안을 삼아야 할까.  들어주기 민망할 정도로 유치하고 비속어로 떡칠을 한 가사가 근래에 워낙에 많다보니.. 
이래저래 애착이 가고 기대도 많이 되는 그룹이다.  비장하고 어두운 컨셉, 그리고 '한국에서 인기 없는 장르'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메탈을 선택한 용기가, 그걸 꾸준히 밀고 가는 뚝심이 몹시 가상하다.  '대세'와 타협하지 않고 더 센 음악으로 더 멀리 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이들이 언젠가 (수명이 길지 않은 걸그룹의 특성상 너무 오래 걸리면 안되겠지만) 크게 흥해서 쩔어주는 라이브 밴드와 함께 단독 공연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나아가 장르 자체에 대한 인식도 바꿔주는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한다. 

 

오ㅃ... 아저씨가 많이 응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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