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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어중이의 변(辯)

Spirit of Radio 2020. 12. 30. 02:54

"오빠는 취미생활도 인텐스하게 하는 거 같아."

 

어느 날 아내가 한 말에 피식 웃으며 동의한 기억이 있다.  일단 내가 매사에 쓸데없이 진지한 사람이라 "취미생활"라고 이야기한 것도 재미있었고, 또 내 취미생활을 표현하는 데에 "인텐스하다"는 말이 꽤나 적절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더 잘 어울리는 표현을 찾자면 "빡세다" 정도인데, 이건 표준어도 아니고, "힘들다"는 뜻의 방언이라는 설도 있지만 맞는지도 모르겠고 (어차피 이 경우엔 뜻도 안 맞는다).  순화해서 그냥 "세다"라고 하기엔 또 뉘앙스가 다르고. 

 

뭐가 인텐스하다는 건지 대충 스스로 생각을 해보자면: (1) 독서를 할 때는 추리 / 범죄 / 스릴러 / 대하 소설 혹은 철학서나 진지한 교양서 등 좀 내용이 밀도있고 심각한 걸 주로 찾는 편이고 (아내 曰, "직업으로 하루종일 딱딱한 계약서 읽고 쓰고 하는 사람이 여가 시간에도 그런 걸 또 읽고 싶어?"), (2) 포스트 어포칼립스, 그 중에서도 좀비 장르 영상물 애호가이며 ("무섭지 않아? 안 징그러워?"), (3) 메탈 / 하드락 등 헤비한 음악을 많이 듣고 ("응 그 공연은 그냥 혼자 보러 가"), (4) 게임의 경우 주로 난이도가 높고 도전 정신을 자극하는, 또는 파고들기 요소가 많은 것들을 많이 플레이하는 것 같다 ("맨날 죽는다고 스트레스 받으면서 왜 계속 붙잡고 있어?").  상술했듯이, 지성적으로든 감성적으로든 "빡센" 경험을 좋아한다.

 

대충 이런 느낌

개인의 취미 생활을 이야기할 때 문화적 취향과 더불어 중요한 부분이 취미 활동에 임하는 태도와 그에 할애하는 에너지일테다.  나는 한 번 뭔가에 빠지면 꽤 깊이, 스스로 어느 정도 만족할 때까지 파고드는 편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것도 여전히 '취미'로 간주될만한 선에서이고, 사실 진정한 애호가들과 비교했을때 얼마나 인텐스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는 것도 사실이다.  난 여기저기 쉽게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어떤 한 분야에 빠진다고 해도 "일반인 치고는 나름 파고드는" 선에서 그치지 정말 끝장을 보는 수준까지는 보통 가지 않기 때문이다.  악기 한가지를 기똥차게 다룬다든지, 운동 종목 하나를 엄청 잘 한다든지, 한 뮤지션의 광팬이 되어 그들의 모든 것을 꿴다든지, 좋아하는 장르 혹은 작가의 책을 게걸스럽게 읽어 치운다든지, 한 가지 아이템을 작정하고 수집한다든지, 이놈의 블로그를 시작했으면 글이나 좀 자주 열심히 쓰든지(...).  뭐 하나 좋아하는 게 생겨서 좀 파고들다가도 금세 다른 재밌는 게 너무 많이 보여서 하나에만 진득하게 집중을 못하기 때문에.  딱히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늘 기웃거리고 다니는 건 아니지만, 재미있어 보이는 게 시야에 들어오면 일단 좀 건드려 봐야 직성이 풀린다.  이미 다른 걸 하고 있었더라도.  이러다 보니 소싯적에 덕질도 다양하게 해봤고.  

 

달리 말하면, 나는 어디서 주워 듣고 적당히 건드려 본 건 많은데 특출나게 잘 알거나 잘 하는 건 없는 소위 '어중이'다.  그러다보니 심각한 취미가 발전해서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거나 아예 업이 되는 경우를 보면 (그런 경우엔 이미 취미라고 볼 수 없겠지만) 정말 멋져 보이고 부럽다.  좋아하는 것에 그만큼이나 파고들 수 있는 열정이 멋지고, 그 열정을 한데 꾸준히 쏟을 수 있는 집중력과 끈기가 부럽다.  나도 열정이 없는 사람이 절대 아니고, 좋아하는 건 어느 정도 보통 이상으로 파고들기는 하지만, 내 열정은 아무래도 저격총보다는 산탄총, 가마솥보다는 양은 냄비에 가까운 모양이다. 

 

본문의 내용과는 상관 없는 이미지입니다

뭐 부러운 건 부러운 거지만, 그렇다고 내 방식이나 성향이 딱히 열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같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위안하기 위해 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취미가 업이 되면 더 이상 즐기지 못한다는 이야기도 있고 (물론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그건 하늘이 내린 거고).  조금 산만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늘 새롭고 재미있는, 깊진 않아도 폭이 넓고, 적당히 인텐스한 취미생활도, 뭐 괜찮지 않은가?  유사 전문가들이 판을 치고, 따라서 직업적 전문성이 더욱 중요해진 시대라지만, 애초에 취미로 밥 벌어먹고 살 게 아니라면 굳이 취미생활까지 전문적으로 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취미라는 게 원래 남들한테 자랑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나 좋자고 하는 거고, 돈 벌려고 하는 게 아니라 쓰려고 하는 거니까 말이다.  취미가 재테크인 사람들은 부럽긴 하다.  

 

양은 냄비가 빨리 끓고 또 빨리 식는다지만, 그만큼 여러가지를 뜨겁게 맛볼 수 있으니 좋지 않은가.  불은 항상 켜져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난, 오늘도 즐거운 어중이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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