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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리 와 보렴.  네가 락 음악을 좋아하면, 밴드를 하고 싶으면, 이건 꼭 들어봐야 한다." 

 

Stairway to Heaven이라는 불세출의 명곡과 나의 첫 만남은 그렇게, 나의 취미생활을 적극적으로 응원해주시던 아버지의 소개를 통해 이루어졌다.  당시 우리 집에는 아버지께서 젊은 시절 구매하셨던 빈티지 데논 앰프와 턴테이블, 내 허리까지 오던 KEF 스피커가 있었으니, 심지어 장비마저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이 장비들은 약 10년 전에 우리 집으로 이사를 왔다).  한창 락/메탈 음악에 빠져들던 중학생 소년이 고전 락에 입문하는데 이보다 멋진 계기가 있었을까.

 

워낙에 다방면에 유식한 분이시지만, 음악 - 특히 당신이 한창 음악을 들으시던 7-80년대의 - 에 대한 우리 아버지의 애정과 지식은 특히나 괄목할만한 것이어서, 내가 뭔가 음악 감상을 할라치면 "어 이건 XX년대 한창 잘나갔던 누구누구의 음악과 판박이로군" 이라고 늘 한마디 하며 지나가시던 기억이 있다.  '뭐 이런 촌스러운 걸..' 이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린 경우도 있었고, '내가 듣는 음악 중 옛날 거랑 비슷하지 않은 음악은 없는 건가?' 라는 생각에 괜시리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지만, 아버지의 관심과 간섭(?)을 통해 결과적으로 많은 고전들을 접하게 되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고마울 따름이다.  부전자전이랄까.  음악에 대한 나의 관심과 사랑, 지식에 있어 아버지에게 받은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2. 

 

"이 친구들은 누구니?  캐나다에 러시라고 굉장한 밴드가 있었는데 비슷한데.."

 

다룰 줄 악기는 플룻밖에 없는 주제에 오기 하나로 고등학교 밴드부에 들어 드럼을 치겠다고 설쳐대며, 그 나이대 밴드하는 고딩들이 으레 그러하듯 뮤지션들의 '연주력'에 집착하던 시절, 드림 시어터의 음악, 그 중에서도 마이크 포트노이의 절륜한 드럼 연주에 한껏 심취해 있던 나에게, 아니다 다를까 아버지께서 던지신 한마디였다.  그런데 이 러시라는 밴드, 프로그레시브 메탈 장르를 만든 거나 다름 없는 분들이라고 한다.  게다가 본인들도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드림 시어터 형님들이 존경하는, 또 그들에게 음악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주신 분들이란다.  이걸 지나가다 듣고 맞추신 아버지도 대단하시고..  이래저래 들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러시, 그리고 역사상 최고의 락 드러머중 한 명으로 칭송받는 닐 피어트를 알게 되었다. 

 

 

3.

 

그 후 내가 금세 러시에 푹 빠져버렸음은, 그들의 대표곡 제목을 따서 만든 이 블로그의 제목만 봐도 다들 아실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런 걸 세 명이 만들었다고?  이 연주는 뭐지?  사람인가?  이게 라이브가 되나?  어 되네?  심지어 진짜로 셋이 다 하네?  변화무쌍하고 대곡 지향적인 전개는 분명히 프로그레시브 음악인데, 귀에 쏙쏙 들어오는 리프/멜로디도 있고.  가만히 들어보면 가사는 또 얼마나 시적인가. 

 

육중한 기계장치 같은 느낌이 들었던 드림 시어터의 음악 (물론 그들 음악은 그 묵직한 맛에 듣지만), 좋긴 분명히 좋은데 약빤 느낌에 접근도 쉽지 않았던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 (물론 그들 음악은 그 약 맛에 듣지만) 등과 달리, 러시의 음악은 뭐랄까, 진보적이지만 난해하지 않고, 세련되었지만 동시에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그런 느낌이었다.  

 

이 쯤 해서 자료 영상 보고 가실게요.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 기념 공연 중 The Sprit of Radio 앵콜 라이브)

 

러시 멤버 전원이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로 존경받는,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연주력을 가진 분들이지만, 아무래도 내 자신이 드럼을 치다보니 나에게는 드러머인 닐 피어트의 연주가 특히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물론, 화려하고 복잡하지만 동시에 단정하고 극도로 정교한 그의 드러밍은 굳이 드럼을 다뤄본 적이 없는 사람이 보아도 충분히 경이로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드럼셋부터 굉장히 크고 아름답다).  괜히 러시 공연에서 수만명의 사람들이 에어드럼을 치고 있는게 아니다.  

 

두번째 자료 영상 보고 가실게요 (에어드럼 보시라고 2:33에 마크해뒀지만 물론 처음부터 보시는 걸 권장합니다).

(또 다른 대표곡, Tom Sawyer 라이브)

 

피어트가 드럼만 잘 친게 아니라 작사가로서의 역량도 출중했던 것도 잘 알려진 사실.  (멤버 모두 그랬지만) 사생활도 깨끗했고, 딸과 아내를 각각 사고와 병으로 1년 안에 모두 잃는 엄청난 비극을 겪고도 술이나 마약 등에 빠지 않고 여행과 저술 활동으로 건전하게 이겨낸 뒤 밴드로 복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4. 

 

그랬던 닐 피어트가, 프로 아마추어 할 것 없이 나를 포함한 전 세계 모든 락 드러머들의 영웅이었던 닐 피어트가, 지난 1월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  2015년 말 건염 악화로 (40년 넘게 그렇게 드럼을 쳤으니..) 은퇴를 선언한지 4년여 만의 일이었다.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도 늘 음악에 대한 진지한 자세와 품격을 잃지 않았던 러시는 은퇴마저도 점잖고 우아했고,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밴드 은퇴의 모범적인 사례로 꼽히고는 한다.  보컬이자 베이시스트였던 게디 리의 다음 인터뷰를 보자. 

 

 

"닐은 완벽주의자에요.  자신의 연주가 사람들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수준에 조금이라도 못미치는 건 원하지 않았죠.  드러머로서 평생 닐의 원동력이 된 것도 그런 마음이었고, 또 그렇게 마지막을 맞기를 바랐어요.  그 뜻을 존중해주고 싶었습니다."
"한 번 은퇴를 결정한 이상 고별 투어 같은 것으로 그걸 돈벌이로 이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멋진가.

 

 

5.

 

2012년 10월, 러시는 이제는 그들의 마지막 작품이 된 Clockwork Angels 앨범 발매 기념 투어를 돌고 있었고, 다행히 학생 신분이라 평일에도 시간 여유가 좀 있었던 나는 보스턴 TD Garden에 있었던 그들의 공연에 가볼 수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러시의 공연이었고, 마침 전날이 생일이었던 내가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씨디로만 주구장창 듣던 그들의 음악을 한 번이라도 라이브로 들을 수 있었어서, 닐 아저씨의 신기에 가까운 드러밍을 직접 볼 수 있었어서, 참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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