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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국 아이돌 음악은 듣는 음악이 아니라 보는 음악"이라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멤버들의 예쁘장한 외모와 화려한 퍼포먼스, 설명을 들어도 솔직히 뭔 말인지 잘 모르겠는 '컨셉'에 다양한 마케팅 전략을 더하여 만들어진 종합 엔터테인먼트 상품이고, 음악은 단지 부수적인 요소라고 말이다. 독창성보다는 유행과 대중성을, 곡의 전체적인 완성도보다는 잘 들리고 오래 남는 가락 - 소위 훅(hook) - 을, 치열한 고민 없이 쉬이 찍어낸 것 같은 가볍고 자극적인 가사들을 주무기로 한 이 시대의 '팝송'을 가지고 예술성을 논하는 것은, 그래서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왔다.
물론 이러한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방탄소년단을 비롯한 여러 한국 아이돌 가수들은 국내외로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음악 자체를 놓고 봐도 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노래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고, '아이돌'이라는 단어와 흔히 결부되는 (대부분 좋지 못한) 편견을 깨고 작사, 작곡, 심지어 편곡에까지 참여하며 음악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보이는 친구들도 늘고 있는 듯 하다. 애초에 소위 '댄스 음악'을 앞세운 아이돌 그룹들이 가요계를 지배하게 된 계기가 서태지라는 진지한 음악인이었음을 생각하면 퍽이나 재미있는, 그리고 다행인 일이다.
2.
툴(Tool)이라는 밴드가 있다. "2006년 메탈리카가 내한 왔을 때 오프닝 했던 밴드"라고 하면 아실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비평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굉장히 잘나가는 양반들인지라 "뭐? 툴 짬에 오프닝..?"이라며 충격 받으실 분 들도 있을 테다. (물론 짬이란 상대적인 거니까.. 내가 작년 이맘때 갔던 Scorpions 공연의 오프닝은 무려 메가데스였으니.) 하지만, 대부분은 아마 모르실 거다..ㅠㅠ
메인이 다름 아닌 그 메탈리카이기도 했지만, 툴 정도의 밴드가 오프닝으로 전락한 데에는 당시 한국에서 그들의 인지도가 워낙 바닥이었던 것도 한 몫 하지 않았을까 한다. 심지어 메탈리카 공연을 보겠다고 모인 자칭 메탈팬들 중에서도 "쟤들 누구냐 오프닝이 너무 길다"며 불평한 사람들이 있었을 정도니.. 일반 대중들 사이에선 답이 안나오는 수준이라고 보면 되겠다. 출신지인 미국에선 참 잘나가는데, 왜 한국에선 지지리도 인기가 없을까. 나는 그 이유가 '너무나도 불친절한 음악'에 있다고 생각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이들의 음악은:
- 길다. 대부분의 곡이 5-7분은 우습게 넘어간다.
- 한 곡 내에서 박자, 조성, 분위기가 수도 없이 바뀐다.
- 무겁고 어둡고 차갑다.
- 귀에 착 감기는 훅이 없다.
- 싱글보다는 앨범 단위의 감상을 전제하고 만들어졌다.
이렇다 보니, 이들의 음악을 제대로 감상하는 데는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하다. 특히 프로그레시브/사이키델릭 장르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긴 러닝타임에 걸쳐 툴 특유의 음울한 에너지가 켜켜이 쌓여가는 과정을 참을성을 가지고 감상한다면, 쌓여 응축된 에너지가 드디어 폭발하는 순간 그때까지의 기다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껴질 정도의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경험할 수 있다. 일단 익숙해지면 황홀하게 멋진 음악이지만, 한 번, 잠깐, 대충 들어서 진가를 느낄 수 있는 음악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곡의 구성과 가사, 멤버들의 기량, 레코딩, 심지어 앨범 아트워크까지, 이들의 CD에서는 (어느 정도의 과대망상이 동반되었을 것이 분명한) 예술가로서의 자신감, 결벽증 수준의 장인정신 뭐 이런 것들이 물씬 느껴진다. 그러다 보니 뭔 놈의 앨범 하나 나오는 데 5년 10년씩 걸리고, 일단 나온 앨범들도 자존심 때문인지 스트리밍 서비스와 제휴 없이 아직까지 CD나 LP로만 팔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앨범은 나오는 족족 차트 꼭대기까지 올라가며, 미국 내에서만 몇백만장씩 팔린다. 물론, 상술했듯 한국에서 이들의 인지도는 아직도 처참하다 (일단 2006년 이후로 아직도 새 앨범이 안나왔다 =_=).
들어보지 않겠는가.
3.
접점이 없다시피 한 이 두 부류의 음악 - 아이돌 그룹들의, 그리고 툴을 위시한 소위 '진지한 음악인'들의 음악 - 을 한 데 이야기한 이유는, 그것이 흥미로운 생각할 거리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음악의 '예술성'은 어디서 오는가? 독창성? (새로운 음악이 익숙한 음악보다 반드시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대중성? (더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음악이 '매니악'한 소수만이 좋아하는 음악에 비해 더, 혹은 덜 예술적인가?) 수학적 복잡성 혹은 정교함? (비틀즈의 히트곡들은 브람스의 교향곡에 비해 덜 예술적인가?) 아니 애초에 음악을 가지고 객관적으로 우열을 가릴 수가 있는가? '좋은 음악'이란 대체 무엇인가? 라디오헤드의 음악은 모모랜드의 음악보다 더 수준 높고 좋은 음악인가? 그렇다면 그렇게 결론 내릴 수 있는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물론 이런 케이스도 있다.
(접점이 없다시피 하다고 했지 아예 없다고 하진 않았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이러한 질문들은, 결국에는 "무엇을 위해 음악을 듣는가"라는 매우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질문으로 귀결된다. 내가 아이돌 음악의 예술성을 논하는 데에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것도 그 때문인데, 아이돌 음악은 애초에 작자에 의해 만들어지고 청자에 의해 '소비'되는 목적 자체가 다른 음악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많은 수의 아이돌 음악은 진지한 감상을 위한 예술작품보다는 멤버들의 외모나 퍼포먼스 등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작되고 소모되는 것처럼 보인다. 애초에 음악이 핵심 요소가 아닌 상품에 대해 음악성을, 예술성을 논하는 데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4.
사람마다 음악을 듣는 목적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나의 경우 크게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1) 정서 환기
2) 정적을 없애기 위해, 배경으로서
3) 탐미
물론 위의 목적들은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1번 같은 경우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더라도 2번이나 3번의 목적을 가지고 음악을 듣다 보면 부수 효과로서 자연스레 일어나는 경우가 많으니까. 나에게 있어 음악을 듣는 가장 큰 목적은 3번, 즉 탐미라고 할 수 있지만, 많은이들에게는 2번의 목적이 주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면, 많은 이들에게 아이돌 음악은 꽤 훌륭하게 목적을 수행할 것이고, 따라서 '좋은 음악'일 것이다.
2007년 한 매체 와의 인터뷰에서 이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음악은 희구할 만한 대상이 아니에요. 궁금하고, 갖고 싶던 예전의 지위에서 벗어났죠. 어디를 가도 음악은 나오지만 ‘침묵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한 가장 소극적인 의미에서만 음악이 살아 있는 것 같아요.”
10여년도 전의 이야기지만, 이러한 경향은 시간이 흐르며 점점 심화되지 않았나 한다. 음악 자체가 많아지고, 접하기도 쉬워졌으며, 그에 따라 '음악 감상'이라는 행위가 더 일상적이고 보편적이 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가볍게 소비되는 휘발성 음악도 그만큼 많아진 것, 또 진지하게 음악을 희구하고 탐미하는 것이 점점 특이하고 고리타분한 행위로 취급받는 세태는 참 안타깝다.
5.
뭘 위해 음악을 듣는지, 그래서 결국 어떤 음악을 듣는지는 어차피 사람마다 다 다를 터이다. 누군가에게는 티아라의 야야야가 음악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의 극치일 수도 있고, 누군가는 제국의 아이들의 Mazel Tov를 들으며 힘든 시기를 이겨냈을 수도 있다. 반대로 핑크 플로이드의 Money를 듣고 이게 뭐야 몰라 무서워 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결국 음악이란, 예술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니까. 그러므로 아이돌 음악의 예술성을 논하는 데 의미가 없다는 내 생각은 틀렸다고 할 수 있겠다. 아이돌 음악이 '보는 음악'이고, 음악이 핵심 요소가 아닌 '종합 엔터테인먼트 상품'일수는 있을지언정, 거기에 들어간 고민과 정성의 절대량이, 그리고 그 결과물의 수준이 반드시 부족하지만은 않을테니까 말이다. 어쩌면 잘 만든 음악은 그냥 잘 만든 음악이고 (기준이 뭐가 됐건간에), 창작에 대한 진지한 태도라든지 만들어진 목적 따위는 애초에 별 중요한 게 아닌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다양한 예술작품을 접해보고 그를 통해 알게된 것들을 바탕으로 능동적으로 취향을 형성하는 것과, 수동적으로 만들어진 제한된 표본에서 개중 괜찮은 것들을 꼽아 그것을 취향으로 삼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이다.
주절주절 긴 이야기를 했지만,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결국 하고 싶은 얘기, 원하는 건 이거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음악을 다른 행위를 위한 배경 혹은 수단으로서가 아닌 그 자체로서 즐기게 되는 것. 어디 차트에 올라오거나, 방송에 자주 나오거나,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제가나 배경으로 깔아주어서 비교적 귀에 익숙한 음악 말고도 다른 좋은 음악, 새로운 음악을 능동적으로 찾아서 편견 없이 들어보는 것. '음악 감상'이라는 행위가, ('독서'와 더불어) "자기 소개서 '취미'란에 딱히 쓸 게 없어서 쓰는, '취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무언가가 아닌, 진지하고 멋진 취미로 다시 인정받는 것. 그럴 수 있는 여유가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멋진 음악들이 널리 향유되고, 그에 고무된 음악인들에 의해 더 좋은 음악이 더욱 많이 만들어지는 선순환이 이어지는 것.
6.
당신은 무엇을 위해, 어떤 음악을 듣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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